*이문구 저 <매월당 김시습>을 읽고.

매월당은 (1435~1493년, 세종 17년~성종 24년) 다섯살의 어린 나이에 문장을 잘 한다는 소문이 나서 세종앞에 불려갔을 정도로 신동 소리를 들었습니다.   임금께서 하사하신 비단 50필을 어쩌나 보려고 네 힘으로 가져가라 하자 포목들을 주르륵 펼쳐서 이은 다음에 그 한 끝을 허리에 감고 걸어나가서 어린 김시습의 지혜를 시험하려던 대신들을 놀라게도 했다는 일화가 있답니다.  세종은 김시습의 조부에게 전지까지 내리셨습니다.  '내 특히 앞에 부르려 하였으나 사람들이 알 것을 저어하여 그만 두는 것이니.  제 아비에게 이르되. 부지런히 가르치고 재주와 학문을 드러내지 않게 하라.  나이가 되고 배움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서 크게 쓰리라.' (이문구 작가의 소설에서 인용)

매월당은 세종이 돌아가시고 단종 1년에 치룬 첫번 째 과거 시험에서 낙방합니다.  그러나, 신동이란 소리를 듣던 젊은이로서의 개인적인 상처와 실망을 딛고 일어서기도 전에, 세조의 왕위 찬탈이라는 역사적인 정변이 일어나자 (단종 3년) 그는 비분강개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됩니다.  세조를 암살하려던 모의가 들통이 나서 사육신이 탄생하는 와중에 그는 생육신의 하나로 불리우며 술과 유람의 세월을 보냅니다.  그러는 동안에 <금오신화>라는 최초의 한문 소설을 비롯하여 수많은 시 (2천여수 이상이 전해짐)를  남깁니다.   유교가 나라의 근간을 이루던 이조시대에 유교와 불교에 통달하고, 벼슬의 길에서 자의반 타의반 멀어진 채 이단자의 삶을 살다가 59세에 세상을 떠난 김시습--후세의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 말했다 합니다.

요즘 소설의 트랜드인 듯, 과거 역사 속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알려진 단편적인 글문, 행적들을 재구성하여 완전 소설화된 책들을 여러 권 읽었습니다.  황진이, 정약용, 정조, 김시습 등등 주인공들은 각양 각색입니다.  이문구 작가의 <매월당 김시습>도 그런 맥락에서 실제의 매월당이 남긴 수많은 시조를 인용하고, 여러 곳에 기록된 그의 행적들을 교묘하게 현재형으로 짜넣습니다.   그가 남긴 시문, 그의 동시대인이 남긴 그에 관한 기록이 김시습이라는 인간이 지녔음직한 일관되고 고유한 심리적인 경향의 옷을 입고 그의 처지와 부합되게 묘사되니, 김시습이라는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과거를 거쳐 벼슬을 해야 입신양명을 하던 시대에, 길거리를 부랑하던 김시습은 당시의 사회제도의 불공평을 고발합니다.  즉, 당시의 토지 제도는 토지를 국유화한 과전법으로 직책상 세밀하게 나누어 진 등급에 따라 농토를 관리에게 부여했습니다.  그런데 벼슬아치가 그 자리를 떠나도 땅은 그대로 부쳐먹게 하였고 또 그 관리가 죽은 후에도 국가에 환수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에, 결국은 늘어나는 관리의 수로 인해 과전 용지가 달리게 됩니다.  이 부작용을 해결하고자 과전법을 직전법으로 바꾸어 현직 관리에게만 땅을 주게 합니다.  그랬더니, 관리들이 현직에 있는 동안에 평생 먹을 것을 확보하느라 농민들에게 엄청난 수탈을 하게 되어 농민들은 극심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게다가 공신전이라 하여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이들에게 주는 땅은 자자손손 세습이 되었습니다.  태종, 세조가 각각 인척들을 없애고 왕위에 오른 지라, 당연히 그들 주변에는 공신들이 수두룩하니 늘어서 있지요.  (세종은 단 한 명의 공신을 두지 않았다는 귀절이 유난히 눈에 뜨입니다.)  공신들의 자제는 과거에 응하지 않고도 벼슬길에 오르는 특혜도 누립니다.  김시습은 이 공신전의 배급으로 인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기 때문에 신하들이 더더욱 남들을 모함하고 스스로를 공신으로 세우는 일이 잦아진다고 한탄합니다. 

세조의 불의에 격분한 집현전 학자 중심의 단종 추대 움직임이 들통나는 바람에 사육신을 비롯한 수많은 인재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연히, 그 이면에는 수많은 공신들이 탄생했지요.  그런데, 조선의 국법상 역모는 삼족의 남자들(16세 이상인 자)을 멸하였고, 공신들은 막대한 재물과 후손의 장래까지도 보장받는 희비의 쌍곡선이 그려집니다.  그 중에도 책을 읽던 저를 놀라게 한 것은 단종 편을 들던 사육신을 비롯한 많은 관리들의 부인과 딸, 모친들이 세조 편에 서있던 공신들의 종으로 전락당한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개의 부인은 강맹경의 집에, 며느리는 계양군의 집에 종으로 보내지고, 성삼문의 어머니는 이홍상에게, 부인과 딸은 박종우에게 주어집니다.  하위지의 부인과 딸은 권언에게, 유성원의 부인과 딸은 한명회에게, 유응부의 부인은 권빈의 종으로, 김문기의 부인은 유수의 종으로 등등 수많은 벼슬아치의 가족들이 바로 얼마 전 까지 동료였던 신숙주, 정인지, 홍달손, 박원형 등등의 집안에 종으로 보내집니다.  심지어 신숙주는 단종의 18살난 왕비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청하였다고 합니다.  세조로서도 그것은 허용치 않고 그녀를 부인으로 봉하고 문종의 외손자의 양육을 맡겼다고 김시습은 기록했답니다. 
 
삼강오륜을 앞세우고 예의와 도덕에 가치를 두었던 유교 사회 이조에서 벌어진 여러번의 사화와 정변을 어려서 국사 시간에 배우며 지리하게만 여겼던 적이 있습니다.  '이 조상님들은 어찌 이리 당파싸움만 하고 사셨는고' 하고 말이지요.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 과거에 일어난 일의 원인과 결과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역사를 다시 읽으며, 많은 것을 새로이 깨닫게 됩니다.  야심이 많던 수양대군(세조)에게도 어떤 명분은 있었지요.  단종의 모친이 궁녀였다가 사후에 왕비로 추대됨에 따라 그가 문종의 적자가 아니므로 문종 사후에는 바로 아랫 동생인 자신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그리고 수양대군 밑에는 공명과 부귀영화를 노리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일을 꾸밉니다.  쿠데타가 성공하고, 상대방(단종 편)의 씨를 말리기 위한 도륙이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많은 사람들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고......세월은 흘러 갑니다.  500여년이 지난 이 시점에 우리는 세조가 고작 13년의 왕위를 누리고 51세로 세상을 떴음을 압니다.  무엇이 옳았고 무엇이 틀렸던가를 새삼 따져볼 필요도 없이, 과거의 승자들과 과거의 패자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과거에 존재했던 수많은 무명의 백성들도 각자의 삶을 접고 사라져갔지요.  역사 속에서 유명 무명으로 제 몫을 하고 떠났을 수많은 인간들을 상상해보며, 지금 현재의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도 때가 되면 망연히 퇴장을 해야하는데...  "오백년 후의 역사에서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와 인물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궁금한 마음이 불현듯 듭니다.